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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대통령의 화교통제정책
글쓴이 : 芝枰 날짜 : 2020-10-24 (토) 02:17 조회 : 601
강용석의 인싸뉴스에 달린 댓글에서 퍼온 글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중국놈들의 부동산공정 놔두면 대한민국은 작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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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적 피해의식 잔존의지 극복

2.화교경제활동억제책 으로 서민경제 위축현상극복

박정희 집권 후 아프리카급이었던 소득수준이 점점 솟구쳐 오르면서 그 산업화의 열매들은 화교들이 따먹을까봐 걱정되었던 박정희대통령, 그는 화교들의 사유재산을 묶어버리고, 거주지, 사업장은 일정 이상 늘릴 수 없도록 묵어버렸다. (6.25 이전. 박정희 등장이후에도. 이땅에서의 화교들의 경제능력은 상당했다. 알부자들도 많았다.

김동리 소설'감자'를 보면 중국인 지주 왕서방 얘기가 나온다. 일제시대에도 화교의 경제력은 막강했다. 왜냐하면 전세계 화교타운을 보면 알겠지만, 인구수가 많고 잘 뭉치며 장사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화교들은 꼭 땅을 사서 일대를 다 화교타운으로 만드는 습성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우리나라의 화교에 대해서는 단호한 정책을 펼쳤던 것으로 유명하다.

1945년 해방당시 국내거주화교는 60만명이었으나 1961년 군사혁명이후 정부의 강력한 화교정책으로 국내거주 화교는 1975년경 5만7천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게 통계청 자료다.

박정희 대통령의 화교정책은 중국에 대한 역사적인 피해의식 잔존과, 화교들의 경제활동으로 인한 서민경제 위축을 회복한다는 두가지로 대분 할수 있다.

이 당시 정부정책은 화교의 경제활동 억제책이 최우선 과제가 될 정도로 이들의 경제 봉쇄정책은 화교들에 의한 제반 인허가 사항 제한까지 다양하게 이뤄졌다.

중국집부터 원료재료 공장 등 각종 화교사업자체를 인가 및 허가 취소와 함께 영업중인 업소에 대한 재연장 억제 등으로 이후 중국집이 한국인 손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다.

특히 화교들의 부동산 및 동산 매매거래 제한은 가장 큰 이슈였다.

집이나 토지등 부동산 매입에 대한 행정관서의 허가제한.

심지어 자동차 구입도 할부구입은 제한됐고 할부구입시 공무원3급이상 보증인을 세우도록 한 조치는 아예 판매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1990년까지 시행됐다.

이런 경제적 압박과 통제가 이들을 한국땅을 등지게 한 요인이 되었는데 세계 어디를 가도 차이나 타운이 형성돼 있었지만 한국에는 없었던 시절이1960-1990년까지이다.

그 이후 인천에 소규모로 차이나 타운이 형성된 것은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에 발전된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동남아시아의 국민들이 헐벗고 사는 이유가 화교들이 동남아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있아야 하는데 당시 한국의 돈은 모두 지하에서 음성적으로 유통되고 있어서 이 지하자금을 양지로 끌어내어 경제발전에 사용하려 하였다. 지하자금의 큰 손들은 대부분 화교들이었는데, 한국에서 멸시 받으며 악착같이 돈을 번 중국인들은 돈을 벌기만 했지 쓰지않고 모았으며 이잣돈을 놓아 돈을 불렸다. 모국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이들 화교들은 오직 황금과 현금 만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62년6월1일 박정희 정권은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화교들도 한국민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던 구화폐를 새로 발행된 화폐와 바꿔야 사용할 수 있었다. 정부는 일정한 금액 이상은 화폐 교환을 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나머지 화교들의 현금재산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 때 거액의 현금을 보유했던 많은 화교들이 파산했다.

1970년 두 번째의 화교 통제책으로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화교들은 1가구에 1주택과 1점포만 허용되고, 주택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하고 또한 취득한 토지의 건물은 자신만 사용하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도록 하여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이다.

당시 서울 소공동에는 화교학교를 비롯하여 환전소, 중국음식점 등이 즐비핬는데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화교들도 많았다. 도심의 금싸라기 땅에 있는 건물이니 값 또한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나 화교들의 부동산 소유가 인정되지 않자 일부 화교들은 친분있는 한국인 명의로 부동산을 등기했다가 배신 당해 자신의 부동산을 빼앗긴 사례들도 있다.

이처럼 화교들의 경제활동이 제한되자 화교들은 제대로 된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소규모의 중국음식점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48년경에 불과 332개에 불과하던 중국집이 1972년경에는 2454개로 폭증하게 되었다. 이 때 박정희 정권은 중국음식점을 겨냥한 2가지 통제정책을 발표했다.

첫째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한국인의 주식인(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 둘째는 자장면 가격을 정부의 허락을 받고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첫번째 조치는 한국인의 주식인 쌀의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으며, 두번째 조치는 당시에 중국음식점을 하고 있는 화교들이 밀가루 거래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장면 가격을 통제함으로써 밀가루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 중국집의80%이상을 화교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가 자장면 가격에까지 개입하면서 화교들은 경제적으로 철저히 통제 되엇으며, 그로 인해 더 이상 한국에서 살아가기 어렵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이 되자 한국정부의 화교에 대한 차별 정책에 지친 화교들의 (탈 한국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 하나 둘씩 대만이나 홍콩, 호주, 미국 등으로 떠나기 시작하여 화교의 절반 이상이 한국을 떠났다.

화교들이 운영하던 중국집은 그 밑에서 주방보조를 하던 한국인들이 헐값에 매입해서 중국집 사장으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역사적 과정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화교자본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 화교 수가 계속 줄고 있는 나라,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1970년대 초반 3만5천 여명이던 화교는 이제 2만 남짓하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이 동남아 몇몇 국가들처럼 화교들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한 화교들은 일본으로, 동남아시아로, 캐나다로, 미국으로, 다시 거주지를 옮겼고 전세계 화교 커뮤니티를 통해 박정희를 욕하고 다녔다. 지금 남은 화교들은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며 한국에 남은 사람들이다.

차이나타운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 좀 완화됐는지 모르지만 새로 들어온 중국인들도 많고 오래전부터 있었던 화교들은 대부분 한국인으로 국적변경했다(재일 3세들이 일본으로 국적변경하듯)

한국은 중국이 옆에 있음에도, 화교의 힘이 미미한 나라다.

베트남도 통일이후 화교탄압정책을 한바있습니다  이것이 빌미로 베트남 중국국경전쟁( 1982년)으로이어진것입니다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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