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절대적으로 정해져있다고 본다. 최소한 자율성을 보장받고 싶은 인간(넓게는 현실의 모든 존재)이 가진 자유의지 조차도 말이다.
믿음은 그러하나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공식을 발견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비록 그러한 공식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믿음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인 또는 근사적인 증거는 부지기수로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마음의 형태까지 공식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이 걸어가는 삶의 외적인 길은 공식화할 수는 있다는 생각이 녹아있는 것이 바로 역(易)이다. 그 중에 사주학은 그 길을 정형화한 형태이다.
사주는 주기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지구의 운동이 이러한 형태를 유지한다면 사주의 형태도 큰 변화는 없다. 그런데 인간사는 고작 100여년전부터 급변하고 있다. 마치 사주학은 낡은 형태로 퇴보되고 현실을 못따라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인간의 삶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세계적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고 하나의 사주로 표현되는 삶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사주학은 현실의 빠른 변화를 따라잡기에 부족하고 표현의 한계성마저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이런 외적인 모양새를 보면 사주학은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세계를 표현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주학의 정교성 또는 깊이에 대한 연구 부족으로 하나의 사주로 표현되는 다양한 인간의 고유한 삶의 모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연구의 깊이가 깊어질 수록 하나의 사주로 뭉쳐있던 고유한 삶들이 개별적으로 분석이 될 것이란 생각을 늘 해오곤했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면에 대한 생각이 밀려오기도 한다.
인간의 삶을 다각형이라고 보자. 같은 삼각형이라도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은 무한대이다. 하지만 삼각형이라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 같은 사각형이라도 가로세로의 길이에 따라 사각형의 모양은 무한대다. 하지만 사각형이라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 이것을 좀 더 일반화 한다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나 오각형이나 원이나 닫힌 폐곡선의 형태이고 결국은 같은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수학적으로는 위상기하학의 기본 개념이다.
사주학이라는 도구는 개개의 고유한 삶을 유일무이하게 분석하는 것이 아닌 무한대로 다양한 삶에 대한 어떤 공통된 특질의 표현도구가 아닐까 한다는 자각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사주학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이 마치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비판의 근원들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관점으로도 보인다. 즉, 사주학은 인생의 위상학이다.
역(易)은 단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항상 이면을 가지고 있다. 역(易)으로써의 사주학이 그동안 인간의 고유한 삶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되어 왔다면, 또 다른 면으로써,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인간의 삶들 속에서 어떤 공통된 특징(질)을 짚어주는 위상학적인 면도 강하게 가지고있다는 것을 피력하고 싶다.
사주 +-- 고유한 삶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 +-- 공통된 삶의 특질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 (겉보기에 서로 다른 삶들의 형태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