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학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학문이다.
사실 연해자평이후 현재까지의 사주학은 학(學)이라 불리우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잘 정제된 논리가 있는 반면 얼토당토 하지 않는 설도 굉장히 많다. 수준이 그러하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것들은 골라서 버리면 그만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으니 아량있게 사주학이라 칭해주자. 많은 사알못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사주학은 운명학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 이런 명제를 두고 사주학은 완성된 학문이다 라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판기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으면 원하는 음료수가 튀어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무심코 믿는다. 사주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궁극적으로는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궁극의 목적일 뿐이고, 인간의 지력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 사주를 접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다. 배우다 보면 한계에 부딪히고 실망하기도 한다. 책이나 사람들이 떠드는 만큼 신기한 것도 없고 대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신내림 받는 사람들도 있고, 온갖 신살에 빠져 횡설수설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주는 무엇인가? 사주를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사주는 인간의 삶을 표현한 어떤 형태의 식(式)이다. 사주를 본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길흉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사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삶의 길흉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사주는 부적이 아니다. 사주는 어떤 작용이 있는 식이다. 작용이 있다는 것은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용이냐에 따라 길흉이 나타난다. 길흉에는 절대적인 것도 있고 상대적인 것도 있다.
사주에는 표상이라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다. 표상이란 현실에 대한 표현을 의미한다. 어떤 현실을 표현하는가? 현실이란 사람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표현이 사주라는 형태다. 인간과 관계된 것들이 사주로 표현된다.
인간세계는 아주 불가측하게 변하는 듯이 보인다. 사주는 마치 톱니바퀴 같은 일정한 변화의 틀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가 아주 달라 보인다.
사주와 현실을 어떻게 엮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사주라는 프레임으로 현실을 보면 어떤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주라는 관점에서 현실을 해석하면 길흉이 보인다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변화를 사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현실의 모든 것이 사주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아주 아무렇게나 변하는 듯이 보인다. 변화도 다양하고, 변화가 빠른 사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다. 반면 사주 그 자체는 아주 무미건조하고 현실과는 무관하게 제 갈 길 열심히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새로운 변화는 항상 현실에서 먼저 일어난다. 그 후에 사주의 관점에서 그 새로운 변화에 대해 분석을 하고 해석을 가한다. 만약 사주적 패턴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주로 설명 가능한 대상이 된다. 현실이 어떻게 새롭게 변할 지에 대해서는 사주로는 설명 불가능하다. 사주는 현실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 현실에는 항상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그런 현실을 사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주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때문에 사주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의 사주 톱니바퀴 시스템에 어떤 변화를 주지 않는 한 사주 프레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말은 현실의 외형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사주로 표현되는 변하지 않는 길흉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현실의 변화를 어떻게 사주로 해석 가능한가, 그 변화의 길흉은 어떻게 사주로 해석 가능한가. 그것이 사주가 추구하는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