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를 자연수에 비유하면, 주역은 무리수가 된다. 틈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주역은 주역괘와 효를 열심히 외우면 된다. 그 내용에 대해 왜 라는 의문을 달기가 어렵다. 특정 주역괘효가 특정 의미를 가진 것은 주역괘효를 만든 작자의 통찰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통찰의 관점에서 본다면 누구나 주역을 새로운 통찰의 내용으로 재생산해 낼 수 있다. 괘효사의 내용과 그 순서를 임의로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점과 같은 기술적인 내용으로 연결이 된다면 임의로 마음대로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주역에 대한 접근법은 첫 번째는 그것을 달달 외우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심만 하는 것은 아무런 득도 없다. 여기서 의심이란 새로운 통찰을 의미한다.
사주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외우는 것보다는 이해함으로써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사주는 웃고 들어와서 울고 나가는 분야다. 형태가 간단하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주의할 것은 신살 따위에 빠지면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