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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신비경 26
05.06.26 11:37 | 1,463 hit

* 다음은 소위 영조대왕 條(조)이며 기생 논개의 條(조)라는 四(사)甲戌(갑술)
조이다

甲 甲 甲 甲
戌 戌 戌 戌

此(차) 사주는 偏枯(편고) 四柱(사주)이라 썩 좋다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
만 그 환경이 그 사주 역량을 좌우하는 형태가 많다 할 것이라 , 木(목)이 火局
(화국) 墓(묘)庫(고) 丁火(정화)를 살리면 화국 묘고 丁火(정화)는 그 戌(술)
중 戊(무)土(토)를 생하고 그 戌(술)土(토)는 辛金(신금)을 生(생)할 것이라 이
것이 순수 連生(연생)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 그래선 甲(갑)의 官祿(관록)을
삼는 형태를 그린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환경 영향과 그 남녀간 성별이 다름으로 인해서 그 차이가 어떻게
나는 것인가를 예시해 준 것이 바로 영조대왕과 논개의 예라는 것이다
우선 논개를 들어보자 논개는 그 지지가 분명 음양논거에 의거해서 천간이 자신
과 동료라면 지지가 분명 그 배우자들이 될 것이라 이래선 그 배우자 신금의 먹
이감으로 보여지는 것이 甲木(갑목)의 銳氣(예기) 墓庫(묘고)속에 들은 丁火(정
화=丁華{정화}와 그 통한다 )라 할 것이다 이래 정화를 보고 반색하여선 남편
감이 들어오는 것을 고만 丁華(정화)로 辛金(신금)을 물고 그 丁火(정화)에서
한발 더나아간 戊(무)土(토)를 그 辛金(신금)이 봉죽자로 하는 지라 그 戊土(무
토)를 木氣(목기) 甲(갑)이 극제 하여선 그러니깐 논개가 적장을 유혹 꼬득여
선 甲(갑)克(극)戊(무)[木剋土(목극토)하여선] 火克金(화극금)=丁克辛(정극신)
[ 끌어안고선 ] 戌字(술자)가 분명 하늘에 있는 戊字(무자) 달이 땅에 내려와
선 땅달[美人(미인)]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그 하늘 서북 기운이 到 (도충) 동
남 기운 할 것이라 그러니깐 辰字(진자) 水庫(수고) 墓庫(묘고)를 도충해 온다
는 것이라 그러니깐 고만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선 水庫(수고) 강물에 펄쩍
뛰어드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英祖(영조)의 예를 들어보자 영조는 그 남자로서 그 天干(천간)이 자신
과 경쟁하는 경쟁 상대자이거나 그 동방 甲(갑)乙(을) 나라의 그 한 기운을 가
진 것을 표현한다 할 것인데 그렇다면 地支(지지)는 무엇인가? 물론 그 배우자
도 되겠지만 여기서는 그 君王(군왕)의 위치가 甲(갑)인 지라 그 地支(지지)는
臣下(신하)의 위치가 된다는 것이다
또 식솔 子息(자식)의 위치도 된다는 것이다 이래 논개와 같은 논리에 의거해
선 고만 戌(술) 土(토)를 剋制(극제) 木(목) 氣運(기운)으로 제압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한 예가 되었던 것이 바로 思悼世子(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이다 그러
니깐 그러한 방향으로 운세가 흐르게끔유도하게 하여선 그 아버지가 자식을 죽
이는 불미한 사건이 전개되는 것으로서 제반 악운을그 예방 접종 받듯 틀어 막
고선 그 다른 그 甲戌(갑술)條(조)에 의거한 길한 빛을 내게해서는 그 오랫동
안 재위에 계시면서 그 치적을 쌓았다할 것이다
그러니까 뒤주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그 나무로 그 土氣(토기)를 가둬서 죽이
는 원인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辰中(진중)엔 역시 乙(을)木(목)도 있다
그러니깐 戌字(술자)到 (도충) 辰(진)은 그 강물이 아니라 그 질곡의 고통스
런 것이 江河(강하)처럼 흐르는 바다 같은 苦海(고해) 처럼 나무궤짝이 되었다
는 것이다
영조가 그 수명이 길어 오랫동안 재위에 있게된 것 모두가 다 그 흐름작용 조선
의 운세라 할 것이다 당시 정치가 당쟁이 심하여선 그 군왕이라하는 분이 당쟁
의 회생물로 둔갑하는 상태가 비일비재 하는 수가 허다한 형태이라 그렇게 오랫
동한 정권을 유지시켜서는 흑백을 회석 시키지 않으면 다시 반대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영조가 치적한 것보다 더 어려운 국민생활이 될것이라 그래되면
그 사직을 지키는데 어려운 형태가 될 것이므로 그렇게 오랫동안 재위에 있게
된 것이라 할 것이다 당시 장희빈이 나은 경종 영조의 형님이 의문사를 하게된
것을 그 보복이 두려워선 그 영조 편의 사람들이 암살을 했다는 허물을 뒤집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가 재위기간동안 사뭇 그로 인하여선 그 정신적 고통
속에 있었다는 것을 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그 자식을 죽이는 사
건이 연계되어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해방후 과
도기의 여러 부조리 현상이 일어나면서 국세를 키웠는데 그 속에는 그 불미한
요소가 담겨져 잇지 않다곤 못할터 그래 그것을 보복 응징 하지 못하게끔 희석
시킨다는 차원에서 武官(무관)정권이 그래 오랫동안 집권을 한것이라 해도 과
언 아니라 할 것이니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古今(고금)이 같다할 것이


그 연관 지어지는 사도세자의 사주를 다음과 같이 올려 본다

甲 戊 戊 乙
子 戌 寅 卯

이다 소이 木氣(목기)에 土氣(토기)가 갇힌 형태의 사주 모습이다 그러니 이
런 것을 본다면 어찌 宇宙(우주)造化(조화)가 偶然(우연)에 一致(일치)라고만
할 것인가 이다
乙卯寅(을묘인)이라는 궤짝 속에 戊戊戌(무무술) 思悼世子(사도세자)를 집어넣
고선 甲日不開倉(갑일불개창) 子日不問卜(자일불문복) 이라는 그 뒤주 뚜껑을
덮펐으니 아무리 정승 체제공이 상복을 입고선 쫓아가선 사정한들 꺼내줄 입장
이 못되었다는 것이라 그 당시 조정의 정치 사정이 영조로 하여금 자신의 자식
을 뒤주 속에 넣고선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입지로 몰렸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는 것이리라 소이 子日不問卜(자일불문복)은 子字(자자)가 戊字(무자)의 根
(근) 丁(정)을 水克火(수극화)로 쥐고 있기 때문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卜字
(복자)는 이래 고무래를 옆에서 볼적에 누여논 형상인 것이다, 甲子(갑자)는 所
以(소이) 戊字(무자)와 겸해선 이래 있을 적에는 그 연결이 안되고 火氣(화기)
가 끊어진다는 것이리라
소이 時支(시지)의 子時(자시)가 日柱(일주)의 戌(술)中(중)丁火(정화)를 門
(문)으로 출입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소이 子日不問卜(자일불문복)이라는 의미
이다 丙丁(병정)의 火氣(화기)가 年支(년지) 卯字(묘자)門戶(문호)로 탈출하
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래 그 六甲(육갑)이 의미하는 어느 구조를 갖다가선 牽强附會(견강부회) 我
田引水(아전인수)로 해석한다하여도 이래 다 들어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논개 [論介, ?~1593]
요약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출생지 전북 장수

본문
성 주(朱). 전북 장수(長水) 출생.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
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
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 6만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왜장들
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였다. 기생으로서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울분
을 참지 못한 나머지 전사한 장군들의 원한이라도 풀어주고자 열손가락 마디마
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
(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
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
(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
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
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이 날은 장수군에
서 논개아가씨를 선발하고 기념탑을 참배하는 등 논개의 정신을 되새기는 각종
민속행사를 가진다


* 장헌세자 [莊獻世子, 1735~1762]
요약
조선 제21대 영조의 제2자.

호 의재
별칭 자 윤관, 휘 선
활동분야 정치
본문
자 윤관(允寬). 호 의재(毅齋). 휘 선(?). 이복형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
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을 받고 15세에 대리기무(代
理機務)를 보았다. 1762년 김한구(金漢耉)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
(尹汲)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세자
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로하여 나경
언을 참형하고, 세자에게 마침내 자결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뒤주 속
에 가둬 죽게 하였다.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고,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
조가 장헌(莊獻)으로 상시(上諡)하였으며, 1899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追
尊)되었다. 특히 정조가 불행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를 기린 여러 행적은 유명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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