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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신비경 54
05.07.29 08:35 | 1,398 hit

* 다음은 영화배우 金勝鎬(김승호) 명조이다

甲 戊 庚 戊
寅 戌 申 午

天干(천간)에 天上三奇(천상삼기)가 들었고, 地支(지지)에 火三合局(화삼합국)
이 들었다 火三合局(화삼합국) 旺(왕)한 불속에서 그 불꽃이 일어나여선 銳氣
(예기)를 발하는 것이 兩戊(양무)이다 兩戊(양무)가 食傷(식상)과 官鬼(관
귀), 甲(갑)庚(경)到 (도충)을 사이사이로 낑궈 갖고 있는 모습인데 一喜一悲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 戊(무)가 食神(식신)을 生(생)할적엔 官(관)
이 울고 官祿(관록)을 취득할땐 食根(식근)이 억제 받을 것이라 이래 食神(식
신)이 찡그리는 상황이 연출된다할 것이다 아뭍튼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라 할 것이다 함자는 甲木(갑목)干(간)보단 金氣(금기)庚(경)이 든든한 根(근)
을 가진 印綬(인수) 戊(무)에 둘러싸여선 승세를 탓다는 것이니 그래서 金氣(금
기)가 높아졌다는 것이리라 마치 周(주)나라의 도읍지 鎬京(호경)의 雄志(웅
지)와 화려함 처럼 되었다는 것이리라 원래 午申戌(오신술)은 大成(대성) 乾
(건)이나 震(진)卦(괘)의 外飛神(외비신)으로서 根氣(근기)를 가진 申字(신자)
驛馬(역마)를 에윈 태양 午字(오자)수레가 끌려가는 모습이다 그러한 형태 소
이 지금 태양이 가고 있는 것을 쥔 상태 조종하는 상태가 바로 寅(인)이 戌(술)
을 剋制(극제)로 쥔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깐 甲寅(갑인)대가 총체적으로 그 지
휘 거느린 형태 조종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필름[映像(영상)物
(물)을 스크린에 비춰 활동하는 것을 태양이 밝게 진행하는 것으로 본다면]을
조종할수 있는 全權(전권)을 가진 것이라는 것이니 그 주인공도 될뿐더러 그 것
을 제작하는 감독등 총체적인 지휘권을 확보한 형태라 할 것이다 그렇다해도
食神(식신)이 勝勢(승세)를 탓다 하였으니 그 食傷(식상)이 越等(월등)하면 그
官鬼(관귀)를 좌우할수 있는 힘을 가지는 법이라 그 주 내용면상이 또 그 록을
취득하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침이라 그 식상이 결탄코 그 도외시 할수 없
는 형태라 할 것이니 영화가 잘 만들어지고 좋아야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능
력이 내재되게 되어 있는 것이라 그 이를 본다면 식상이나 관귀가 균형을 이뤄
선 서로 잘 보조를 맞출 때만이 무슨 사업이던지 흥행을 하게 된다할 것이다 이
래서 그 戊(무)에다간 甲(갑)庚(경)到 (도충)을 낑궈 논 것이라 할 것이다

김승호 [金勝鎬, 1918.7.13~1968]
요약
한국의 배우.

본명 해수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강원 철원
주요수상 서울특별시문화상(1959),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제7·8회), 청룡
영화상(1967)
주요작품 《시집가는 날》(1956), 《육체의 길》(1959), 《돌무지》(1967)
본문
본명 해수(海壽). 강원 철원 출생. 3대독자로 태어나 보성고보(普成高普)를 졸
업하였다. 동양극장·신협(新協) 등에서 25년 동안 연극생활을 하였고, 영화인
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독특한 인간미를 지닌 연기자로 1956년 문교부 주
최 우수영화 주연상을 수상하였고 1957년 제1회 부일영화상(釜日映畵賞) 남우주
연상, 1958년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국제영화 남우주연상, 1959
년 서울특별시문화상, 제7·8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제2
회 영화세계 남우주연상, 1967년 청룡영화상을 수상하였다.

1946년 영화 《자유만세》로 데뷔, 《시집가는 날》(1956), 《인생차압》
(1958), 《육체의 길》(1959), 《로맨스 빠빠》(1960), 《굴비》(1963), 《돌무
지》(1967) 등 3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연극에도 참여하였다.
특이사항 : 1968년 12월 1일 뇌출혈 사망 했음,

* 다음은 텔런트 李民子(이민자) 사주이다

甲 戊 戊 戊
寅 戌 午 辰

亦是(역시) 地支(지지)에 寅午戌(인오술) 火局(화국)을 짓고선 그 隔(격)하여
辰字(진자)의 到 (도충)을 戌(술)이 맞는 모습이다 天干(천간)에는 세 개의
戊(무)가 있음에 마치 세 마리의 새가 꽃나무 가지 위에 올라 앉아선 노는 모습
인데 그 甲寅(갑인)대를 남편 性(성)을 삼고 있다 甲寅(갑인)戊午(무오)相間
(상간)에 乙卯(을묘)丙辰(병진)丁巳(정사)를 낑궈 갖고 있는데 乙丙丁(을병정)
地下三奇(지하삼기)요 辰字(진자)가 財性(재성)貴人(귀인) 巳兎(사토)를 달고
있는데 그 戌字(술자)의 도충을 맞을 것이라 그 크기가 왕방울 만한 耳懸鈴鼻懸
鈴(이현령비현령)이 하는 것이니 그 귀함을 가히 알만하다 할 것이다 마치 李民
子(이민자)라는 어여쁜 美人(미인)이 그 번쩍이는 눈부신 귀거리를 아주 아름답
고 멋있는 것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할 것이다 개똥이와 합해선 戊形(무형) 넷
이서 짝이 맞는지라 젓가락질을 잘 할 것이라 본신 대의 貴人(귀인) 未(미)나
印綬(인수)貴人(귀인) 등 貴人(귀인)을 붙들어 오는 것을 如反掌(여반장)으로
한다 할 것이다


* 다음은 李朝(이조)때에 大官(대관)을 지낸 우암 송시열의 명조이다

戊 辛 壬 丁
戌 丑 子 未

地支(지지)에 子未(자미)元嗔(원진) 丑戌(축술)三刑(삼형) 子丑(자축)合(합)土
(토)등 丑戌未(축술미)가 三刑(삼형)이 俱全(구전)하는 지라 그 액션을 잘 깔았
는데 그 정치생활과 생애가 파란이요 순탄치만 않다할 것이다 天干(천간)이 逆
順(역순)으로 임까지 銳氣(예기)를 뻗쳐선 그 적합이라고 梟首(효수)鬼神(귀신)
을 붙들어오는 모습인지라 제때에 巨頭(거두)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그것이 밉
게 보이는 원인이 되어선 효수 되거나 사약을 받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무술중궁이 신축금기 해떨어지는 곳을 생하고 그 서방은 壬子(임자)北邙山川(북
망산천)을 생하고 壬子(임자)北邙山川(북망산천)은 적합 도둑넘 달밤의 밤이
슬 꾼 丁未(정미)대를 맞이한다 地支(지지)에 亥(해)를 拱挾(공협) 亥子丑(해
자축)北方(북방) 水氣(수기)를 모두 拱挾(공협) 그 北方(북방)에 관계된 일이
많았으리라 조선의 지정학적으로 관찰할진대 병자호란등 청나라의 득세는 북
쪽 오랑캐 도둑들의 일이라 나라를 망치게 하는 도둑넘 들과 대치하는 생애
를 장식했다할 것이다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 은진(恩津)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별칭 자 영보(英甫),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주요저서 《송자대전(宋子大全)》 등


↑ 송시열유허비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충북기념물 제45호.
본문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
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
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
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
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
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
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
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
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
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
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
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
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
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
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
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
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
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
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
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
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
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
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
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
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
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
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
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
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
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
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
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 《주
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
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
(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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