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명조다
丙 庚 丁 辛
子 午 酉 卯
이제 만주족이 건륭때에 와서 그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보인 모습이다 이름은
弘曆[홍력] 성씨는 노아합적[누르하찌 =노라지]의 자손으로서 厓(애)新(신)覺
(각)羅(라)라 한다
사정방의 자오묘유를 깔고 병정 남방의 도화 꽃을 그 경신금의 관으로 삼았
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멋잇는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라할 것이다 ,그의 방
대한 업적은 다말할수 없고 그 로맨스가 아주 많은 그런 임금으로서 한 시대를
잘 장식한 풍류를 아는 임금이라 할 것이다
건륭제 (乾隆帝 ; 1711.9.25~1799.2.7])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재위 1735∼95)이다. 이름은 홍력(弘曆)이며 시호는 순
황제(純皇帝)이고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모후
는 유호록(?祜祿: 弘毅公額亦都의 曾孫女)이고 황후는 부찰(富察: 察哈爾總管李
榮保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
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는데 이것은 옹정
제의 아들 중 만주족을 어머니로 한 아들은 건륭제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부 강
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
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
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
인(滿人) ·한인(漢人)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
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大金川) 평정(1749), 대 ·소금천(大小金川)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
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南巡) 6회, 동순(東巡) 5회, 서순(西巡) 4회의 내
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外征)과 내순(內巡), 천수연(千戒宴) 등
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
가 총애하던 화신(和筌)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瀆職),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白蓮敎)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
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
통이 열렸다. 예수회선교사들은 그를 태양왕 루이 14세와 비교하였다. 한편 고
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그리고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
의 권력기관으로 ‘가샤(티베트 지방정부)’ 조직을 정하고 구루카족이 침략하
자 군대를 파견, 이들을 물리쳤다
한편, 그는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취미가 선임 황제들보다 각별하여 자금성의
남쪽에 있는 구월관 안에 만든 작업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또한 그는
강희제처럼 예수회의 신부들의 예술적인 재능과 과학적 지식만은 아낌없이 받아
들였다. 이들 서양의 '조언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견륭제로부터 회화
와 건축술의 재능을 높이 인정받았던 이탈리아 선교사 주세페카스틸리오네였
다. 건륭제는 1747년부터 1759년까지 완벽함과 밝음을 뜻하는 여름 궁전인 원명
원의 동북쪽에 서양식 궁정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설계도를 이 밀라노인과
수학자이자 수리학에 정통한 천문학자인 프랑스인 미셀브누아, 두 사람에게 맡
겼다.
건륭제의 긴 통치기간 중에 자금성 안에서 보수와 재건이 그의 취행에 따라 끊
임없이 이루어졌지만, 특별히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장소가 한군데 있
다. 영수궁이 그곳이다. 건륭제는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서, 61년간 통치를
했던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60년간의 통치
기간이 끝나면 영수궁에 칩거하겠다는 뜻을 오래 전부터 밝혀왔다. 그에 따라
영수궁은 1772년에서 1776년 사이에 그의 취향에 맞게 성대하게 보수되었다.
건륭제- 묘호와 시호: 고종순황제
이름: 홍력
재위기간:1736~1795
생몰연대:1711~1799
황후:효현순황후(부찰씨) 1712~1748년 사망
효의순황후(위가씨)1727~1775년 사망
가경제의 생모이며 원래는 황귀비였다
가경제 즉위후 황후로 올려졌다.
황후(오라나랍씨)1718~1766년사망
건륭제의 남순(건륭제는 황제의 딸에서처럼 자주 강남지역을 순방했는데
상당히 들었음)도중 황제의 비위를 거슬려 귀경조치 당한후 절망끝에 사
망했음
장례도 황귀비의 의식으로치루고 황후의 능을 만들지도 못하고 황제와 합
장도 아니한채 건륭제의 후구인 순혜황귀비의 능침에 같이묻혔다.
따라서 황후의 시호, 신패도 없으며 제사도 받지 못했다.
모후: 효성헌황후(뉴호록씨)1692~1777년 사망
원래는 옹정제의 후궁으로 희귀비로 불렸으나 건륭제즉위후 황태후가 되었음
청나라때 가장 장수한 황태후였음
자녀는 아들 17명 딸 10명인것이 정설임
하지만 원래 건륭제남순등으로 궁밖에서 지낸일이 많았으므로 황제의 딸같은 드
라마가 있는거겠죠.
건륭제가 남순을 너무 많이하여 생긴 여담이 있거든요.
건륭제는 원래 옹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라 희귀비가 딸을 낳자 다른 집의 아들
과 바꿨다는 얘기와
옹정제가 옹친와 시절 강희제와 같이간 사냥터에서 시골처녀를 겁간하여 생긴
아들인데 그 아이를 희귀비가 낳은 것으로 했다는 얘기가 있음
건륭제 다음황제는 가경제로 인종 예황제라고 함니다 건륭제의 15번째 아들이었
음,
* 다음은 영화배우 金振奎(김진규)의 명조다
丁 庚 乙 壬
亥 辰 巳 戌
地支(지지)엔 액션 원진을 깔고 천간엔 丁壬合(정임합)속에 乙(을)庚(경)合(합)
이 되었다
액션나무에 새가 앉은 형국인데
완전 귀신이 멋있는 그림을 그렸다할 것인데 辰巳(진사)와 戌(술)亥(해)는 원
래 대칭 天文(천문)을 깔고 있음이라 그 述事(술사)를 좋아 했다 할 것이다
太陰(태음) 戌(술)亥(해)의 시체 속에 또 辰巳(진사) 시체를 깔고선 金(금)[乙
(을)庚(경)] 까마귀[壬辰(임진)]인데 아주 화려하게 꽃을 연출해 보이는 붉은
벼슬을 단 금 까마귀라 할 것이다 財性(재성) 乙(을)이 年干(년간)壬(임)에 生
(생)함을 입어선 힘이 있는 適合(적합)인데 辰亥(진해)에 根(근)을 박고선 丁
巳戌(정사술)로 꽃을 피워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함자는 庚字(경자)金(금)이 辰(진)을 지닌[手(수)] 떨치는 샛별[분명 丁火(정
화)에 무딘 庚(경)金(금)이 단련 되어선 사자 권총의 타겟 辛(신)을 이루어선
빛나는 별]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壬(임)乙(을) 기러기가 나라 들어간 모습
같기도 하고 먼저있던 기러기는 날려보내고 乙(을)壬(임)이 날아 들어가선 자
리를 차지한다면 그 변형 侯(후)를 이루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소이 그 계통의 제후 왕이라는 의미이다 (두=투구)형과 겹해서 본다면 乙(을)
壬(임)이 날아가선 그 侯字(후자)의 머리를 겸해 이루면서 人字(인자)를 올라
탄 모습 그래서 아주 탁 맞춘 화살대로 들어 앉은 모습 사냥을 아주 잘했다는
표현이리라
대정역상은 1360 으로서 水風井卦(수풍정괘) 四爻動(사효동) 井(정) (추)[가을
추자 아래 상와 瓦(와)字(자)한 자= 벽돌 (추)字(자)임] 우물은 목마른 갈증
을 해소 시켜주는 곳이고 만인이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것이다 그 우물의 벽을
수리해선 잘 만든다는 의미이다
* 다음은 단종대왕의 사주조다
丙 丁 丙 辛
午 巳 申 酉
한글 기억과 니은형이 맞물린 모습인데 辛酉申巳(신유신사)와 丙丁丙午(병정
병오)가 엇비슴 丙巳(병사)로 接戰(접전)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金氣(금기)가
火氣(화기)에 먹히는 모습 마치 힘센 숙부 수양이 단종을 올라타고선 죽으라
고 주먹으로 마구 두둘겨 패는 것 같다
辛酉申巳(신유신사) 굽이치는 영월 청룡포가 나의 적합이라고 丙丁丙午(병정병
오) 단종 임금이 가서 맞물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결국엔 시신이 강물에 떠 있
는 형상을 그리기도 하고 [丙辛(병신)合水氣(합수기) 巳申(사신)合水氣(합수
기) 申酉(신유)太陰(태음) 巳午(사오)太陰(태음), 丙丁(병정)亦是(역시) 天干
(천간) 太陰(태음)이라 명명해 볼수 있는데 그 물에뜬 꽃 시신 이런 것을 연상
시킨다 ]
그 꽃을 피워 보이는데 소위 영월 그 단종 대왕의 넋을 기리는 단오제(端午祭)
의 근간이 되지 않았나 하여본다 강릉 단오제라 하지만 영월에서도 단종제라
하여선 그래 봄철에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잘못된 정보인진 몰라도 예전
엔 그 단오때 열린 것으로 필자가 알고 있다 , 물론 단오의 근간은 신라때 이전
서 부터 그 근간을 찾을 것이다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와도 관련이 있다할 것이다
*영월 엄씨(寧越嚴氏) 충의공파(忠毅公派) 울산문중(蔚山門中)의 가장 큰 집성
촌이다. 산성 엄씨라고 불리는 영월 엄씨의 울산문중은 불사이군과 충(忠)의
대 표적 문중이다. 충으로 인해 엄청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울산문중은 영
월 엄씨 시조 엄임의(嚴林義)의 12세손인 단종 충신 충의 공 엄흥도(嚴興道)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