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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신비경 25
날짜 : 2005-06-24 (금) 10:16 조회 : 1456

* 다음은 그 이름도 혁혁한 청산리 싸움의 주역의 한 분인 이범석[李範奭,
1900.10.20~1972.5.11] 장군의 명조이다

戊 戊 戊 庚
午 午 子 子

庚字(경자) 大將(대장)이 휘하 將卒(장졸)을 거느린 모습이다
그 휘하 장수 한분 으로 참여 했다는 의미이다 庚字(경자) 대장은 금좌진[김좌
진,金佐鎭] 장군을 말한다 , 金氣(금기) 銳氣(예기)는 날카롭다는 뜻이니 刀劍
(도검) 武(무)를 상징한다
戊子(무자)는 어머니[母(모)]란 의미이다 戊午(무오)는 成(성)字(자)란 의미이

武班(무반)의 어머니로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 아버지는 그렇다면, 김좌진이란
의미이다
여기서도 金斗漢(김두한)의 이야기 출생까지 말하여 주고 있다
김두한이는 김좌진[庚字(경자)]장군의 아들[子(자)]로서 그 어머니를 여러분
둔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두한이 사주를 참고적으로 가져오면

己 辛 戊 戊
丑 丑 午 午

이다
그러니깐 김두한 아버지 휘하장수도 김두한이의 어머니 격수가 된다는 것이리
라 김좌진 장군의 아들 適合(적합)이라고 그 丑(축)丑(축)을 깔고 있고 이범
석 장군의 兩(양) 戊午(무오)대가 여기 년월대로 되어진 모습이다
소이 김좌진 장군은 아직 좀 무딘 金(금)이고 그 김두한이 한테 와서 그 제련
된 金氣(금기)라고 辛金(신금)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범석 [李範奭, 1900.10.20~1972.5.11]

요약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9)
주요저서 《우등불》


1900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
으로 망명,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
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둥베이[東北: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靑山
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전(革命戰)에 참가하였
고, 1933년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장교대장,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
관, 1940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 광복군 참모장에 취
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朝鮮
民族靑年團)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
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950년 주중(駐中)대사, 1952년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
며, 그 해 8월과 1956년 2차례 부통령(副統領)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
다. 1960년 충청남도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
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저서로 회고록 《우등불》
이 있다.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김좌진 [金佐鎭, 1889.11.14~1929.12.25]

요약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安東)
호 백야(白冶)
별칭 자 명여(明汝)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남 홍성(洪城)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 김좌진장군생가지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충남기념물 제76호.

본문
본관 안동(安東).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출생. 형규
(衡奎)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
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
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
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
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
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
고,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
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
(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
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
(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
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
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
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
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
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
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
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
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
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
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
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
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
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
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
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
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
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
다.


* 다음은 송대 시인이며 문장가인 소동파 명조이다

乙 癸 辛 丙
卯 亥 丑 子

文房四友[문방사우]가 다 갖춰진 모습이다
乙卯(을묘)는 펄프종이라 하기도 하고 그 붓이라 하기도 한다 癸亥(계해)는 물
이다, 辛丑(신축)은 辛(신)은 먹이고, 丑(축)은 벼루다 또 辛(신)은 붓을 상징
하기도 한다 , 丙子(병자)는 관직에 아들이란 의미이리라= 합하면 그 彩(채)彰
(창) 風流(풍류)의 대명사 西王母(서왕모)라는 의미가 나온다 , 그리곤 그 빛
을 낸다는 의미이다, 丙辛(병신)이 合火(합화) 水氣(수기) 보조하여선 大河小
說(대하소설)을 쓰고 있다 , 丙子(병자) 丁丑(정축) 澗下水(간하수) 졸졸거리
고 흐르는 틈새의 물은 큰 大海(대해)와 큰 시내의 물을 이룬다 소위 큰 문장
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庚子(경자) 辛丑(신축) 壁上土(벽상토)는 벽위에 붙친 흙이라는 의미로써 그
글 쓰는 행위까지 여기선 그리고 있다 벼루에 먹을 갈아선 辛字(신자)역시 붓
대 도구로도 봄에 이것을 벼루 먹갈은 소이 庚子(경자) 辛丑(신축)은 子丑(자
축)合(합)土(토)인데 이것이 흙과 물을 서로짓이겨 개는 모습 소이 먹을 물에
가는 모습 그래선 벽에다 바르는 모습 소이 글을 쓰는 모습이 된다, 庚辛(경신)
은 그 무딘금을 제련시켜선 날카롭게 만들어선 그 보기 좋게 드러내 보이는 것
이고 그 壁(벽)은 단단하게 물에 개인 흙이 굳어져서 이뤄진 것이다 , 그러니
깐 글을 붓으로 써서 물기가 마르면 그 굳어진 金石(금석)의 종류 단단한 모습
의 글씨 형태가 남는다는 것이리라 그리곤 오래간다할 것이다
水氣(수기)가 목기를 보고 흘러가니 大河小說(대하소설)을 쓰고있으며 江河(강
하)의 화려한 꽃을 그린다 할 것이다
대 시인 이란 것이다
그 적벽부가 유명한줄 알고 있는데 그것 까지도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


소동파 [蘇東坡, 1036.12.19~1101.7.28]

요약
중국 북송 때의 시인.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본명 소식(蘇軾)
별칭 자 자첨(子瞻),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국적 중국 북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주요작품 《적벽부(赤壁賦)》

본문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
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
(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
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
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
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
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
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
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
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
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
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
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적벽부 [赤壁賦]
요약
송나라 소식의 작품.

저자 소식
장르 부
발표 1082년

본문
필화(筆禍) 사건으로 죄를 얻어 황저우[黃州:湖北省]에 유배되었던 소동파가
1082년(원풍 5)의 가을(7월)과 겨울(10월)에 황저우성 밖의 적벽에서 놀다가 지
은 것이다. 7월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 10월에 지은 것을 《후적벽부》
라 한다.

‘부’란 운문(韻文)의 하나인 문체의 명칭인데, 사물의 서술을 중심으로 한 한
대(漢代)의 장려한 작품에서부터 육조(六朝) ·당(唐)시대의 형식적인 소형 작
품으로 쇠퇴한 ‘부’의 장르를 생동하는 묘사로, 서정과 사상을 겸비한 문장으
로 부활, 완성시킨 작품이 이 《적벽부》이다. 삼국시대의 옛 싸움터 적벽의 아
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대비, 자연과 일체화하려는 소동파의 제물(齊物)의 철학
이 결부되어, 유려(流麗)한 표현과 함께 문학으로서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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