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곰곰이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는 그것이 어떻게 어디서 왜 생기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야 말로 비이성적인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과학이 아니다.
사주 자체에는 유일성(unique)이 없다. 사주는 마치 줄기세포(stem cell)와 같은 것이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사주는 거울이다. 아무리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만들어진 똑같은 거울이라도 각기 다른 곳으로 팔려 나가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다른 세상을 비춘다.
사주연구는 다양한 방향으로 해야 한다. 동일한 사주에 대해 연구를 한다면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사주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 대한 연구다. 이것은 사주가 동일해도 누구나 공통되게 갖는 특징을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주는 같지만 다른 성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는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연구다.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사주가 같더라도 사주가 표상하는 바는 다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도 다르게 된다.
사주는 주어지는 것이고, 가족관계도 주어지는 관계다. 사주는 주어진 인간관계들에 대한 해석이다. 사주를 통해 어떤 인간관계가 주어지는지 결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간관계가 주어질 것이다라고 억지로 예측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환경(인간관계)을 해석하는 것이 사주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이다.
사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지 알 수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당연히 한국어가 모국어가 될 것이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영어가 모국어가 될 것이다.
한국에 남겨진 쌍둥이 동생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된 쌍둥이 언니는 친부모의 가난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별을 하게 됐다. 동생은 가난 속에서 살아왔고, 언니는 풍족한 새양친을 만나 살아왔다. 동생은 친모를 암으로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언니는 새양친과 행복한 삶을 살았다. 언니는 이미 친부모와 일찍 이별을 했다.
주어진 환경이 다르다는 것은 사주에 비추어진 현실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주해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사주를 믿으시나요?"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사주가 뭔지 모른다. 사주에 대한 개념조차 머리 속에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주하면 운명이 떠오른다. 운명은 보통 절대적 운명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현재 이 글을 쓰는 것도 운명이다. 그런데 과연 사주에 이런 운명이 나와 있을까? 마치 마법사가 수정구슬 속을 들여다 보면 미래가 훤히 보이듯이 그렇게 운명이 사주에 나와 있을까?
안타깝지만 사주에서 의미하는 운명과 일반인들이 말하는 운명은 다르다. 사주에는 사람의 인생을 완벽하게 정의해놓은 그런 운명의 글귀나 좌표는 없다. 그 어떤 운명술도 그런 경지에 다다른 것은 없다. 사주가 말하는 운명은 시시콜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의하는 운명이 아니다.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운명이 있을 뿐이다. 사주 자체는 포텐셜이 있고 어떤 운에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마치 동일한 테니스공이 있다 해도 아스팔트 바닥에 던지면 통통 잘 튀고, 모래 위에 던지면 잘 튀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공이지만 어떤 환경에 던져지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튀는 정도가 다르지만 같은 테니스공임에는 분명하다.
사주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