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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내내 사주에 미쳐있던 이야기
글쓴이 : 芝枰 날짜 : 2022-03-04 (금) 02:40 조회 : 463
뭔가를 검색하다가 검색 결과에 떴길래 클릭해봤다. 의례 저런 글들은 마지막에는 자조적으로 끝나곤 하는데 역시나 그렇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대답할 수 있는 건 그냥 굉장히 오래 됐다는 것이다. 과거 언제부터인가 우리 인간들은 미래에 대해 궁금해 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미래에 대해 미리 알 수 없을까 라는 궁금증을 버린 적이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 호기심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는 미래를 마치 동영상이나 사진을 찍듯 알 수는 없어도 길흉이 언제 일어나는 지에 대해서는 가늠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와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반복적이라는 것은 패턴이 있다는 뜻이다.

사주는 육십갑자라는 닫힌계에서 패턴을 보는 것이다. 저 블로거가 바라는대로 60갑자가 정해놓은 운명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질 수 없다. 육십갑자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육십갑자를 벗어난다는 것은 시간을 벗어난다는 말이다. 육십갑자가 의식 속에 존재하든 안 하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주에도 원리가 있지만 통계의 범주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사주는 주역에 근거하지 않는다. 주역과 사주는 완전히 뿌리가 다르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삶을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해를 하면 안 된다. 인간이 발명한 운명술은 절대적인 미래를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 오직 패턴만을 볼 뿐이다. 그 패턴도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오직 근사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완벽하게 알 수도 없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발명품 운명술은 빈틈이 많다.

비록 우리가 완벽한 운명을 알 수는 없다 해도 운명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예를 들어 소리를 통해 대화를 한다면 소리에 정해진 패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매번 항상 우리의 목소리가 다른 소리를 낸다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이렇듯 따지고 들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다만 인간의 지력이 그걸 다 알 수 있는 수준은 아니기에 굳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답답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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