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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신비경 29
날짜 : 2005-06-30 (목) 10:16 조회 : 1389

* 다음은 安昌浩(안창호) 조인데 이범석 장군조와 類似(유사)한면이 있다

癸 癸 癸 戊
丑 亥 亥 寅

* 함자로는 갓머리여인이 물을 드넓게 창성 시킴을 알린다는 뜻으로서 갓머리여
인은 戊字(무자) 여인 門戶(문호)가 년간 머리에 있다는 것이고 昌盛(창성) 시
킨다는 의미는 寅字(인자)의 밝음 映寫機(영사기) 돌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로
인하여선 癸亥(계해)丑(축) 北方(북방) 水氣(수기)가 만연하게 펼쳐지는 것을
말한다할 것이다
* 所以(소이) 戊字(무자)에 適合(적합)하는 戊(무)에 麾下(휘하)무리중에 한사
람이라는 것인데 戊字(무자)를 제압하는 寅木(인목) 관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戊癸合火(무계합화)를 寅亥(인해)合木(합목)이 받들 처지인데 그 妬合(투합)의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그래 못하겠다는 것이리라 그 조선말엽의 개화사상의 선구
자로서 西勢(서세)를 접하는데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의 한 분이다
閔中殿(민중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는지 모르지만 당시 國母(국모)가 戊干
(무간)이라 이래 받들 처지인데도 그 이념의 달리하여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
고 여러 足跡(족적)을 남기지 않았나 하여본다 을사보호조약 이후로는 우리나라
가 국권을 상실한 상태이라 1895년 乙未(을미)년에 민비가 시해되었는데 그로
부터 십년후 을사 년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와는 아무런
연계 관계가 지어지지 않고 그 戊字(무자)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할 것인데 소
이 끝에 金局庫(금국고) 丑字(축자)가 있는 것을 보니 西勢東占(서세동점)의 胎
動(태동)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 원래 三癸(삼계)는 丑(축)中(중) 辛金(신금)으로부터 나오는 銳氣(예기)이
다 ,所以(소이) 寅字(인자) 映寫機(영사기)가 타겟 丑(축)中(중)申(신)金(금)
을 亥亥(해해)로 뻗쳐 비춤에 여기서 그 映像(영상)이 癸(계)로 화하여선 허공
중이나 마찬가지인 天干(천간)에 떠선 보게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戊字(무
자) 년간이 의도하는 적합으로서 일대 그 무대에서 연출하는 연기 그 청중을
끌어놓고 감동 시키는 그러한 작용 행위가 아닌가 한다 소이 나무에 앉은 꾀꼬
리나 앵무새가 일대 그 적합한 옥선율 변론을 토함에 그 청중 관람객이 빠져드
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안창호 [安昌浩, 1878.11.9~1938.3.10]
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

호 도산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평남 강서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 안창호 선생동상 /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본문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
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
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
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
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
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
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
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
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
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
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
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
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
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
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
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
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
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
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
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
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
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
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
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
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
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
호 우체국'이 생겼다.


* 다음은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李完用(이완용)이의 사주이다

乙 辛 己 戊
未 亥 未 午

함자를 본다면 이씨조선을 완전하게 둘러 엎펏다는 뜻이다 用字(용자)는 뿔따
귀가 거꾸로 처박힌 모습 뿔은 主權(주권) 權威(권위) 君王(군왕)의 王冠(왕관)
등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을 고만 거꾸로 노은 것이라 완전히 둘러 어펏다 할
수밖에 더 있겠는 가 이다
사주를 보자 동방 甲乙(갑을) 木(목) 나라가 칼에 의해서 동강이 나는 모습이
다 閔中殿(민중전)도 辛亥(신해)대를 세웠지만 여기서도 또한 그 辛亥(신해)에
의해선 나라가 절단 난다는 것이리라
원래 戊午(무오)는 成字(성자)이다 姓氏(성씨)를 결부 시켜 푼다면 사주에 나
무가 넉대가 들었다는 것은 이씨의 자손을 의미하 기도하지만 이씨 후손의 나
라인데 그것을 辛亥(신해)로 절단 시킨다는 것이다 戊字(무자)는 달인데 달속
에 나무라는 것은 계수나무인데 계수나무는 木(목)과 雙(쌍)土(토)로 이루어 졌
다[所以(소이) 戊己(무기) 雙(쌍)土(토)에 木(목) 氣運(기운)이 가득하다] 戊
午(무오)成字(성자) 계수나무 桂字(계자) 그 이태조 成桂(성계)가 이룬 동방나
라 [未未(미미) 바둑판으로써 다스리는 땅을 의미함 ]를 戊己(무기)가 生(생)하
는 辛字(신자) 그 機具(기구)가 到 (도충) 乙(을)을 맞아선 대단하게 성깔이
를 내어선 그 銳氣(예기) 亥字(해자)所以(소이) 刀劍(도검)을 이루어선 바둑판
未(미)를 未未(미미)로 두동강 내어버리는 그러한 형태의 사주 구성으로 된 모
습이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이씨 조선을 그둘러 어펏다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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