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국회의원 梁一東(양일동)이 명조이다
己 丁 甲 癸
酉 酉 寅 丑
함자 그대로 들보감 댈만한 하나의 동쪽이라는 것이니 소이 月柱(월주) 甲寅(갑
인)대가 年柱(년주) 癸丑(계축)수순을 잇는 육갑으로서 丁己(정기)로 銳氣(예
기)를 日柱(일주)時柱(시주)의 干(간)을 만든 모습인데 소이 甲(갑)의 빛나는
형태 棟梁(동량)감 자질을 말한다할 것이다 酉酉(유유)가 있으니 눈이 높다는
것이요 그 권위적이라는 것이리라
동량을 잘 다듬는 도구가 되어 있는 것이 酉酉(유유)라 이래 그 사람됨이 귀공
자 타잎이라는 것이다 自刑(자형)이기도 하다
癸丑(계축) 북방새가 黎明(여명)방을 보고 날아 들어가니 두 개의 둥지가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財(재)합국을 짓는데 투합이 될 것이라 재물은 상당하게
양호할 것이나 그 처궁이 문제가 혹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食傷(식상)대가 時
柱(시주)에서 예기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형태이라 이렇게되면 그 時支(시지)
는 官宮(관궁)으로 子息(자식)궁인데 그 食傷(식상)이 강하여선 자식궁을 억압
하는 형태가 아닌가도 하여 본다 쌍 천을귀인 둔 모습이다 妬(투)元嗔(원진)이
니 아마도 그유가 대단하게 활력있게 움직였으리라 봄에 그 상당한 부유함과
여인들에 인기를 받았으리라본다
백과 사전에 것을 퍼오면
* 양일동 [梁一東, 1912.12.30~1980.4.1]
요약
정치가.
호 현곡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전북 군산
본문
호는 현곡(玄谷)이다.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33년 베이징[北京] 민둬고등학교
[民鐸高等學校]를 졸업하고, 8·15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이어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연속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新民黨) 원내총무·정무위원을 역임하며 1971
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통야당으로 자처해 오던 신민당이 정통성
시비로 내분에 휘말리자 1973년 반진산계(反珍山系)가 뭉쳐 민주통일당을 창
당, 그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77년 민
주통일당 총재에 취임하여,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 5선의원이 되었
다.
* 다음은 동학 이대교주 최시형의 명조이다
丙 壬 壬 丙
午 寅 辰 戌
兩壬(양임)을 兩丙(양병)이 양쪽에서 到 (도충)하여 안고 있는 모습이다 소
이 그 가르침[壬(임)]을 크게 만들어 노은 모습 이다 그 敎主(교주)라는 것이
다
더군다나 地支(지지)에 火三合局(화삼합국)을 짓고선 그 庫門(고문)을 到 (도
충)시키는 모습이라 그 火局(화국)勢(세)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선 훨훨 불
이 타는 속에 兩壬(양임)이들은 모습인데 그 水庫(수고)의 月(월)支(지)에 근
을 두고 있는 모습인지라 그 兩壬(양임)도 만만찮은 勢(세)가 되었다 큰 가르침
으로서 그 가르침을 받아 먹을 대상 火局(화국)을 아주 크게두었다는 표현이
다 兩丙(양병)이 兩壬(양임)을 두둘겨 패니
그 汚濁(오탁)한 세상을 들깨우고 세탁하는 형태이라 그래선 그 寅辰(인진)方局
(방국)으로 食傷(식상)을 내려선 그 火局(화국)으로 銳氣(예기)를 뻗쳐선 그 火
局(화국)이 또 兩丙(양병)을 꽃을 피운 가운데 들은 모습인지라 고만 아주 부처
님 같이 꽃 가운데 좌정한 모습이요 그래서 세상 만인에게 그 가르침의 덕화를
내리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 최시형 [崔時亨, 1827~1898]
요약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별칭 초명 경상(慶翔)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경북 경주
본문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
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
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
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
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
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
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
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
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
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
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
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
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
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
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
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
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
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